맨시티감독 펩 과르디올라의 연봉은? (계약,딸,선수시절,패션,인터뷰,명언)
본문 바로가기
유명인의 TOPIC

맨시티감독 펩 과르디올라의 연봉은? (계약,딸,선수시절,패션,인터뷰,명언)

by NAMSTAR 2022. 3. 1.

맨시티감독 펩 과르디올라의 연봉은? (계약,딸,선수시절,패션,인터뷰,명언)


이름
펩 과르디올라
Pep Guardiola
본명
주제프 과르디올라 이 살라
Josep Guardiola i Sala
출생
1971년 1월 18일 (51세)
스페인 카탈루냐지방 바르셀로나주 바게스 삼페도르
국적
스페인 스페인 국기
신체
키 180 cm / 체중 88 kg
직업
축구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FC 바르셀로나 C (1988~1989)
FC 바르셀로나 B (1990~1992)
FC 바르셀로나 (1991~2001)
브레시아 칼초 (2001~2002)
AS 로마 (2002~2003)
브레시아 칼초 (2003)
알 아흘리 도하 (2003~2005)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2005~2006)
감독
FC 바르셀로나 B (2007~2008)
FC 바르셀로나 (2008~2012)
FC 바이에른 뮌헨 (2013~2016)
맨체스터 시티 FC (2016~ )
국가대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 47경기 5골 (스페인 / 1992~2001)
7경기 (카탈루냐 / 1995~2005)

 

 

맨시티 과르디 올라 인물 정보 들어가기에 앞서..


스페인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FC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을 거쳐 2016년부터 맨체스터 시티 FC 감독직을 맡고 있다. 선수로서도 FC 바르셀로나의 붙박이 주전 미드필더로 스페인 국가대표를 지내며 활약했지만, 이후 감독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며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2015년 이후 클롭 등과 함께 EPL을 대표하고 있는 명장 중 한명으로, 유럽 현역 감독들 중 가장 많은 트로피를 수집했으며, 바르셀로나 시절엔 부임하자마자 트레블을 넘어 해당 시즌 전관왕을 달성하며 일약 티키타카 전술 혁명의 아이콘이자 당대 축구 트렌드를 이끄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특히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후술되어 있지만 바르셀로나 시절 이후 바이에른 뮌헨과 맨체스터 시티를 지휘하며 챔피언스리그에서 해당 클럽의 눈높이에는 매우 부진한 성적으로 큰 비판을 받으며 평가가 전성기에 비하면 하락세에 들고 있다. 이같은 챔스 토너먼트에서의 지속적인 좌절에는 독특하고 변칙적인 전술로만 이기고 싶어하는 소위 '명장병'이 도지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거의 완벽히 갖춰진 스쿼드와 금전 지원, 선수 수급요건등 모든 조건이 이미 만족되어 있는 초강팀(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시티)만 맡아 결국 유럽 정상에 오르는데 오랜기간 실패하며 비판에 직면해있는 상황이다.

또한 안티들에게는 바르셀로나, 뮌헨, 맨시티처럼 당대 빅클럽에서만 감독을 하며 소위 선수빨을 받는 감독 아니냐는 것이 주된 까임 대상이다. 그의 라이벌이자 동지인 클롭 감독이 어느정도 부진하던 팀에 부임해 팀을 살린 경우가 있는 것과 대조된다는 것. 물론 빵빵한 지원 받고도 성적 죽쑤는 감독들은 많기에, 안티들도 거품이 있다는거지 일정 수준 이상의 명장이라는 것엔 동의하는 편이다.

펩 과르디올라의 선수 경력


현역 선수 시절 외국인 용병 4인방과 바스크 4인방 등 외인들로 구성된 드림팀 FC 바르셀로나에서 팀 내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 출신 주전으로 활약하며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선수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른 노쇠화와 잦은 부상으로 30세의 이른 나이에 바르셀로나를 떠난 이후 세리에 A와 중동의 여러 클럽을 전전했으나 부진과 부상, 약물복용 징계가 겹치며 상당히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FC바르셀로나 (1991~2001)

주요 포지션은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비록 원 클럽 맨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FC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이자 바르셀로나 성골 중의 성골이다. 카탈루냐 출생으로, 외국인과 바스크 선수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팀에서 주전 중에서 사실상 유일한 카탈루냐 출신 선수였다.

바르셀로나의 유스 팀에서 성장했고, 바르셀로나 B팀에서 활동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A팀의 감독은 팀의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였다. 크루이프는 주젭 유이스 누녜스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바르셀로나에 부임한지 1년 만에 베스트 11을 모두 물갈이할 정도로 완전히 갈아엎었지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초기 2년여 동안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를 내고 있었다. 크루이프가 기존 멤버들을 전부 내보내면서 카탈루냐 출신의 레전드를 포함한 기존 선수들은 전부 팀을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성적이 나오지 않자 크루이프를 향한 바르사 팬들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팀의 주전 전원이 외국인과 바스크인으로 채워지자 카탈루냐 팬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이런 불만을 가라앉히고 바르셀로나 팀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전 중에 한 명이라도 카탈루냐 순혈 출신의 선수를 기용해야만 했고 이때 크루이프에게 간택된 이가 바로 과르디올라였다.

기예르모 아모르가 장기 부상을 당하자 크루이프는 B팀에 있던 과르디올라를 1군에 콜업되어 1990년 12월 16일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요한 크루이프는 조교처럼 활용하던 로날트 쿠만에게 펩한테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치라고 지시하였고, 펩은 쿠만을 통해 오늘날 티키타카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식 축구를 익혔다. (크루이프는 자신이 추구하던 축구를 항상 네덜란드식 축구라고 불렀고, 바르셀로나 축구라 부른 적이 없었다. 미헬스 감독 시절을 제외하면 바르셀로나가 그런 축구를 구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 1군 데뷔 이후 곧바로 1군에서 자리잡진 못했고, 해당시즌 1군에서 총 4경기 출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1군에서 기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1-92시즌부터였는데, 91-92시즌에도 바르셀로나 B에서 9경기를 출장하는 등 한동안 1,2군을 왔다갔다했다. 1군에 승격했던 그 시즌에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크루이프와 외국인 스타 플레이어들 간의 갈등으로 1993-94시즌 후반 팀 케미가 박살나 버렸다. 바르셀로나는 1993-94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랐지만 라우드럽과 크루이프의 갈등이 최악으로 치달았고 라우드럽이 관람석에 앉아 있는 가운데 진행된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는 AC밀란에 0:4로 참패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차 경기이다. 이 경기에서 과르디올라는 참담한 수준의 경기력을 보이며 AC 밀란 공격진에게 농락당했다.

1994 ~ 1995년 크루이프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불화로 라우드럽, 호마리우, 쿠만, 스토이치코프 등 드림팀 바르셀로나의 주요 멤버들이 전부 자의반 타의반으로 타팀으로 이적했다. 바스크 4인방 역시 전성기가 지나 차례로 팀을 떠났다. 이렇게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과르디올라를 제외하고 모두 떠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고, 1996년에는 크루이프 감독마저 경질되었다.

바르셀로나는 2시즌간 암흑기를 거친 후 1996년 크루이프를 경질하고 바비 롭슨 감독을 새로 부임하면서 다시 호나우두, 루이스 엔리케,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클루이베르트 등을 차례로 영입하며 팀을 재편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물갈이 되었고, 1기 드림팀 시절부터 남아있던 선수는 펩이 거의 유일했던 덕분에 주장을 맡기도 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라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포지션이기도 했고, 90년대 바르셀로나에 워낙 기라성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많았기에 해외의 많은 문서를 찾아봐도 과르디올라의 현역 시절의 활약에 대한 문서는 의외로 없으며, 대부분 라우드럽,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호나우두, 피구 등 팀내 스타들의 활약상을 이야기할 때 그 팀메이트 중 한 사람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세르히오 부스케츠와 함께 클럽 역사상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힌다.

팀내 주전 중 유일한 카탈루냐 토종 순혈 성골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바르셀로나에서의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사실 당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에는 미카엘 라우드루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 등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고,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스페인 국대에서 주장을 역임할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호세 마리 바케로,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 바스크 4인방이 있었지만 이들 역시 카탈루냐 순혈 성골이 아니었다. 과르디올라는 이런 숱한 스타플레이들에 비하면 그라운드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선수였지만,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언제나 펩이었다. 크루이프의 드림팀이 1994년 불화로 완전히 와해된 후 잠시 암흑기를 거쳐 90년대 후반 다시 재정비하고 부활했지만, 그때도 팀을 이끌었던 선수는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등 외인들이었다.

10시즌간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후 2001년 세리에A 브레시아로 이적한다. 펩이 활동하는 동안 바르셀로나는 여섯 번 라리가 우승, 두 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 한 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두었다.


-세리에 A (2001~2003)

바르셀로나 이후 펩의 선수 시절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외지의 클럽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 카타르 시절을 제외하면 몸 담은 팀마다 벤치를 달구며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었고, 이탈리아에서 도핑에 적발되어 약물 복용으로 출장금지를 당하고 이에 대한 소송전을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갔다.

펩은 FC 바르셀로나에서 10시즌(1991~2001)만을 뛰고 이적한다. 이때 펩의 나이는 고작 30세의 한참 젊은 나이였지만 일찍 노쇠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고, 게다가 잔부상도 있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2000-01시즌이 끝나고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알렸고 이에 펩과 그의 에이전트는 이적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후의 행보는 의혹 투성이다. 당시 기사를 보면 위에 적혀 있는 어느 구단에서도 과르디올라를 영입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2000-01시즌이 끝나고 바르셀로나 수뇌부에서 더 이상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알렸고, 과르디올라는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적하겠다고 발표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세일즈했다. 하지만 당시 기사에 따르면 그에게 접근한 빅클럽은 없었고, 오히려 과르디올라 본인이 여러 구단에 자신의 영입을 타진하며 영업을 했다. 그 중에는 뉴캐슬도 있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에서 감독을 역임했던 바비 롭슨 감독과의 인연을 이용하여 뉴캐슬에 입단을 적극적으로 타진했지만, 뉴캐슬 측은 현재 미드필더 자리에 펩의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단칼에 정중히 거절했다. 

결국 빅클럽과 연결되고 있다는 언플과 달리 실제로 이적한 팀은 전년도에 세리에 B에서 A로 승격한 만년 2~3부 리그 팀인 브레시아 칼초였다. 브레시아 칼초는 팀 역사의 대부분을 세리에 B 혹은 C에 머물던 팀이었으나, 펩을 영입하기 직전 시즌에 세리에 A로 승격하며 노장 로베르토 바조를 깜짝 영입해서 화제를 모은 팀이었다. 


하지만 펩은 브레시아에서 실질적으로 3개월 밖에 뛰지 못하고 먹튀로 전락했다. 그는 2001년 11월 소변에서 금지약물인 난드롤론(스테로이드)가 검출되며 약물 복용으로 기소되어 4개월간 출전 금지를 당했다. 11월 21일 피아첸차전을 마치고 도핑 테스트에서 처음으로 약물이 적발되었는데, 직후 과르디올라는 "영양제를 섭취하긴했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없다"며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29일 라치오전을 마치고 다시 도핑에서 같은 약물이 검출되면서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 출전 금지 처분으로 2002년 상반기에 출장하지 못하며 이적할 때까지 반시즌을 통으로 쉬게 되었다.

이후 펩은 바르셀로나 B팀 감독이 된 후 항소했지만, 항소에서도 그의 약물 복용 혐의가 인정되었다.

2002년 여름 펩은 다시 세리에 내에서 AS 로마로 이적하여 또 한 시즌만 뛰고 이적했다. 로마는 2000-01 우승, 2001-02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펩이 온 2002-03 시즌에 8위로 추락하게 된다. 그는 로마에서 2002-03 한 시즌을 뛰었는데, 사실 로마에서 펩은 완전히 벤치 멤버였다. 리그는 펩은 단 4회만 출장하게 된다. 로마 올드팬들이 최악의 영입에 펩을 꼽기도 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그의 로마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로마는 아예 펩을 포기했고, 결국 몇 달을 다시 브레시아에서 뛰게 된다. 브레시아도 10위로 리그를 마감한다.

펩과 AS 로마에 관한 재미 있는 인터뷰가 있다. 2014/15 챔피언스리그에서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바이에른 뮌헨이 AS 로마와 조별 리그에서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AS 로마와의 조별 예선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과르디올라는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를 언급하며, "나와 현역 시절을 함께 했던 토티가 여전히 경기를 뛴다는 것은 엄청난 사실이다. 내일 경기에서 그는 그라운드에, 나는 벤치에 있을 것이다. 내가 AS 로마의 선수였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지."라는 나름의 자학성 멘트를 남겼다.


-중동, 멕시코 (2003~2006)

세리에A 팬들의 비난을 뒤로 하고 펩이 이적한 곳은 축구 선수들의 은퇴지인 중동 리그이다. 펩이 중동으로 이적했을 때의 나이는 의외로 32세에 불과했다.

그가 이적한 곳은 카타르의 알 아흘리였다. 이번에도 세리에를 떠났을 때 맨유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카타르 리그에 있을 때 맨유, 맨시티, 첼시의 오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 리그에 머무른다는 물론 펩 팬들의 언플이다. 실제로 정식으로 오퍼한 팀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펩이 위의 오퍼를 거절하고 카타르로 간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카타르 알 아흘리로 이적하고 나서 그 곳에서 2003-04, 2004-05 두 시즌을 뛰었다. 카타르에서 그는 세리에에서와는 달리 주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알 아흘리에서 첫 시즌인 2003-04 시즌, 팀은 리그 10팀 중 4위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4-05 시즌 10팀 중 8위로 추락했다. 성적

알 아흘리에 있을 때, 펩은 약물 복용 혐의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징역 7개월을 선고받는다. 2005년 약물 복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보류되었고, 2007년 B팀 감독으로서 항소한 후에는 혐의만 남은 채 징역형은 말소된다. 그리고 2009년에서야 그의 약물 복용이 무혐의로 처리된다. 기욤 발라그가 쓴 펩 과르디올라 전기에 따르면 인간은 9나노그램 이하의 약물을 체내에서 자체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펩에게서 검출된 난드롤론은 2나노그램 이하였기 때문에 이 연구 결과에 따라 무죄가 확정되었다.

카타르 알 아흘리에서 두번째 시즌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펩은 멕시코로 이적했다. 멕시코로 이적했을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가 이적한 팀은 멕시코에서 지금은 2부 리그 팀인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였다. 2006시즌,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더구나 과르디올라는 부상 때문에 많이 출장하지 못했다. 과르디올라는 이적을 모색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결국 은퇴하였다. 멕시코에 있는 동안 Axocopan의 학교에 다니며 지도자 공부를 하기도 했다.

펩 과르디올라의 전술 스타일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흔히 알려진 티키타카라는 이상하고 말도 안 되고 본인도 치를 떨 만큼 싫어하는 단어로 대표되는 전술이다. 정확한 전술계에서의 해석으로는 '포지셔닝 플레이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안전한 짧은 패스를 이용해서 후방에서부터 빌드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이 중앙 수비수 라인으로 내려와서 라볼피아나를 형성해서 후방에서의 수적우위를 베이스로 빌드업을 수월하게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다른 특징은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을 통한 반대 전환. 농구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이름을 보면 단번에 알겠지만 농구의 전술에서 따온 게 맞다.과르디올라의 축구는 점유율 유지를 위해서 중앙을 자주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윙어 2명(또는 윙백이나 오버래핑한 풀백 2명)은 넓게 포진한다. 이는 중앙에서 점유율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시 측면으로 공을 돌려서 점유를 계속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과르디올라의 전술의 핵심 중 하나인 사이드 체인지를 이용해 상대 진영을 허물기 위함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윙어들이 넓게 포진하기 때문에 과르디올라의 팀이 측면을 이용하게 되면 그 사이드로 상대 팀을 포함해서 선수들이 쏠릴 수 밖에 없다. 이때 반대쪽으로 넓게 포진한 윙어는 방대한 공간을 얻게 되고 크로스 혹은 사비 같은 시야가 넓고 패스가 뛰어난 미드필더가 반대편 윙어가 침투하는 공간으로 쓰루 패스를 이용한 순간적인 사이드 체인지로 상대 진영을 허문다.


또한 과르디올라는 수비 시 강렬한 전방 압박을 애용한다. 과르디올라의 압박 전술은 약 3가지 단계로 나뉘는데, 전방에서의 압박을 통해 상대의 공격 진행 방향을 제어하고 한 쪽 측면으로 몰아 넣고, 경기장 중앙에서의 격렬한 압박을 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주어서 상대 선수가 공은 소유할 수 있게 만들되 전방을 향한 위협적인 공격으로의 진행을 막고 백패스 또는 횡패스를 하게 만들고, 백패스나 횡패스를 받은 수비수들은 과르디올라의 팀의 공격수들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더욱 라인을 내리게 되는데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과르디올라의 팀의 라인이 높아지면서 상대 팀 선수들을 상대 진영에 가두게 된다. 과르디올라의 압박 수비는 이 3가지를 무한히 반복하면서 상대 선수들의 실수를 기다리고 상대가 실수를 했을 때 높은 위치에서 공을 빼앗으면서 빠르게 역습을 가져간다. 이는 과르디올라의 경기장의 높은 곳에서 빼앗은 공이 낮은 곳에서 빼앗은 공보다 골로 연결될 확률이 크다는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

과르디올라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삼각 대형 유지이다. 즉,선수들은 상대팀의 압박과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격을 수월히 하고 빌드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공을 주고 받으며 세 명의 선수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삼각 대형을 만들어야 한다. 이 삼각 대형은 11명의 선수들이 모두 끊임없이 허물었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면서 곳곳에서 공격 전개와 탈압박을 위한 기본 포지션이 된다. 간격을 유지하며 상대팀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 왕성한 오프 더 볼 활동을 보여야만 하며, 상대 선수들을 혼란시키기 위한 가짜 움직임도 무척이나 중요해진다. 상대팀의 골대 근처나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는 공격수들에게 자유도를 주지만, 빌드업 과정이나 공격 전개 과정에서 이 삼각 대형을 통해 탈압박 하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기본적으로 발기술이 좋은 골키퍼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골키퍼의 킥으로 바로 자기 진영에서부터 빌드업이 시작될 수도 있고, 상대방이 빌드업 지점을 압박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이 내려오면 정확한 킥을 통해 바로 멀리 있는 동료에게 패스를 해서 역습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르디올라가 스위퍼 키퍼만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렇듯 키퍼 역시 빌드업의 한 축이 되는 역할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과르디올라의 전술은 거쳐가는 팀마다 세부 전술에서 계속 변화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전술은 중앙에서 짧은 패스를 돌리다가 틈을 발견하면 침투에 이은 쓰루패스로 상대를 허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했을 때는 선수들의 특성상 이같은 플레이가 잘 먹히지 않았고, 이때 아르연 로번과 프랑크 리베리라는 월드 클래스 윙어들에게 초점을 맞춘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을 이용한 활발한 측면 공격과 기존의 종방향 움직임을 가져가는 윙백 대신 중앙으로 들어와 빌드업을 돕는 인버티드 윙백을 전술에 접목시킨다.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한 뒤에는 윙 포워드들에게 대각선 침투 뿐만이 아닌 윙어로서의 움직임도 부여하면서 활발한 낮은 크로스를 전술에 추가하였고, 이는 맨체스터 시티가 2017-18 시즌 리그에서 32승 4무 2패 승점 100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표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과거의 전술들을 재해석해서 자신의 전술에 더하기도 한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WM 전술의 재해석으로, 맨체스터 시티 첫 시즌 때에는 하프백을 센터백 라인으로 내리고 풀백 두 명을 중앙 미드필더 자리로 들어오게 하는 형식으로 3-2-4-1 포메이션을 형성해서 WM 형태가 나오게 만들었다. 두 번째 시즌에도 경기중 가끔씩 나오는 형태로 수비형 미드필더가 어디에 서있냐에 따라 3-2-4-1과 2-3-4-1이 혼용된다. WM 전술은 공격진과 수비진을 철저히 분리해서 운용함으로써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를 맞추는 형식인데, 과르디올라는 이걸 자신의 팀에 적용하면서 2017-18 시즌에는 폭발적인 공격과 안정감 있는 수비를 동시에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했다. 2020-21 시즌에는 공격 시에는 3-2-4-1 전술을 쓰지만, 수비 시에는 4-4-2 대형을 사용한다.

펩 과르디올라의 선수단 운영 스타일


펩이 2010년대 축구에 미친 영향력 외에 개인의 코칭 스타일을 보면 대개 극도로 편집증적이라거나, 진성 축덕이라는 평이 중론이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 축구 생각만 하는 기계 수준. 하루에 열몇 시간씩 일을 하는 워커홀릭인데, 훈련이 끝나면 어두컴컴한 감독실에 틀어박혀서 경기에 쓸 전술에 대한 답이 나올 때까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메모해서 경기를 준비한다. 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스타일인데, 바르셀로나 시절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든 것은 유명하며 훈련을 할 때도 공격 훈련을 하는 경우 선수들의 동선을 일일이 정해 두고 선수들의 동선이 엉키지 않도록 미친 듯이 패턴 플레이를 반복한다고 한다.

 

펩 과르디올라의 패션 스타일 & 철학


수트가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감독. 보통 '수트 입었을때 간지나는 감독 이미지'를 생각했을때 떠오르는 감독이다. 180이라는 우월한 기럭지에 얼굴도 잘생겨서 사실 어느 옷을 입어도 대부분 잘 어울린다. 그런데 요즘은 배나온 모습을 보여주는지라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있다.

펩의 아내는 패션계에서 일을 한다고 하여 자신의 패션코디는 오로지 패션쪽 전문가인 자신의 아내한테 맡긴다고 알려져있다. 자신은 오로지 축구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그렇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무리뉴와는 여러모로 얽힐 수 밖에 없는데, 수트 잘 입기로 유명한 두 감독의 스타일을 남성 패션지 GQ에서 다루기도 했다. 두 감독의 패션은 클래식 vs 모던이다.


무리뉴는 주로 무채색의 포멀한 스타일의 수트에 컬러타이, 혹은 노타이로 포인트를 준다. 그리고 겨울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아르마니 회색 오버코트에 머플러를 코디한 모습은 중년 남성 패션의 교본과도 같다. 펩은 보다 활동적이고 모던한 스타일을 중시한다. 타이트한 핏의 수트를 즐겨 입고 언제나 셔츠에 다양한 색상의 풀오버를 매칭시켜 포인트를 준다. 때로는 자켓 없이 셔츠 소매를 롤업하기도 하고, 슬랙스나 슬림핏 데님을 입어 캐주얼한 느낌을 살리는 편이다. 펩의 스타일은 보다 캐주얼하고 모던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남성에게 좋은 모범이다. 남성들에게 좋은 패션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두 미중년 감독이다.

하지만 2017-18 시즌 기점으로 펩은 더 이상 경기장 위에서 수트를 입지 않는다. 후드와 트레이닝 바지로 복장이 아예 바뀌었다. 복장을 바꾼 이유에 대해선 당연하게도 이쪽이 더 편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캐주얼한 복장으로 코디 스타일을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션 센스로 관중과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곤 한다. 펩이 즐겨 입는 브랜드는 스톤 아일랜드.

2020-21 시즌 중반부터는 오픈 암즈라는 자선단체의 후드티를 입고 팀을 지휘하고 있다. 펩이 사비를 들여 기부를 했던 단체인데, 계속 입는 이유는 이 옷을 입기 시작한 후 20-21시즌 팀이 엄청난 상승세를 탔기 때문이다. 의외로 펩 역시 징크스를 믿는 타입이라고 한다.

펩 과르디올라의 인터뷰&명언


"무언가를 변화 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 부터 바꿔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재능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나 결국 노력은 각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축구에는 항상 문제점이 존재한다. 끝이란 없다. 왜냐하면 늘 가능성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승리하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또 한 번 성취하는 것은 훨씬 힘들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에게도 힘든 시기가 찾아 올 것이다. 그 때도 지금과 같이 팬들이 우리에게 성원을 보내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는 팬들을 위해 축구를 하는 팀이기 때문이다."
"부상당한 선수에게 존중을 보여라. 누군가 부상을 당했고 수술을 앞두고 있다. 그 이후에나 우린 그것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날 대단하게 만들어주는 이들은 바로 선수들임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늘 캄프누의 그늘 밑에서 살았고 그것보다 더 열망을 일으킨 건 없었다."
"트로피를 약속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자랑스러워하도록 만들 것이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다."
"축구는 훌륭한 교육과 같다. 상대방이 나보다 낫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공을 소유하는 것이 곧 수비이다. 우리 팀이 공을 가지고 있을 때, 상대 팀은 공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을 다시 탈취하는데 6초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펩 과르디올라의 개인 여담


흔히들 부르는 '펩(Pep)'라는 이름은 애칭이다. 본래의 이름은 카탈루냐식으로 주제프(Josep)이다.
중증 일 중독자로 유명하다. 초과 근무와 야근이 기본인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매일매일 수첩을 들고 다니며 전술연구를 하고 다닌다. 하루에 거의 16시간을 일하는 데 보내며 심지어 08-09 시즌 트레블 하고 나서 바로 다음 시즌 구상을 했다고 한다. 일과를 완벽히 끝내지 않으면 잠도 자지 않는다고.

동생인 페레 과르디올라는 축구선수 에이전트이다. 이승우 형제 등을 관리했고 이승우의 형인 이승준을 직원으로 데리고 있다.

언어 습득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 5개국어를 구사한다. 감독생활을 하면서 쓰게 된 다양한 외국어들을 각각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축구 감독 중에서 특히 국내외로 개인 팬덤이 많은 감독이다. 주로 바르셀로나 시절 팬이 된 케이스가 많은 듯하며, 이 팬들이 과르디올라 감독을 따라 응원 팀을 옮겨가서 그 팀의 원래 팬들과 다투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유독 메시를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르셀로나를 떠나 다른 팀 감독을 하고 있지만 아무리 자신의 팀 선수들이 잘하더라도 항상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수는 메시임을 강조하는 말을 자주한다. 바르셀로나 시절 펩에게 메시가 어떤 존재였는 지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2019년 11월 29일, 펩은 위르겐 클롭과 함께 잉글랜드리그감독협회(LM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4월 6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펩의 어머니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뛰어난 플레이를 봤을 때 경탄하거나 해맑게 기뻐하는 표정이 상당히 코믹하고 인상 깊은데 특히 레반도프스키의 전설의 9분 5골이 나온 경기에서 이를 보면서 소녀스러운 리액션을 보인 장면이 짤로 나돌기도 한다. 일명 펩르가즘.

콜드플레이의 팬이다, 그래서인지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08/09 시즌 챔스 결승전 전에 선수들에게 Viva la Vida를 들려줬다고.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2,000만 파운드(약 325억 원)를 받는다.

 

지금까지 맨시티감독 펩 과르디올라의 연봉과 계약정보 그리고

펩 과르디올라의 딸,선수시절,패션,인터뷰,명언에 대해서 알아봤다.

 

다음에도 좀 더 유익한 정보로 인물 프리뷰를 찾아보며,

펩 과르디올라의 인물 프리뷰를 마무리한다..

반응형